인생이란 언제나 선택의 연속
TRPG 시나리오에는 다양한 형태의 선택이 등장합니다.
TRPG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게임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자유도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나열입니다.
단순히 객관식처럼 나열된 선택지를 고르는 형태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다양한 변주와 변형이 있을 수는 있겠죠.
어떤 순서로 공략을 진행하는가? 메인이벤트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서브 퀘스트를 먼저 수행할 것인가? 포로에게 얻은 정보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배신자일지도 모르는 저자의 말을 믿을 것인가? 동료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적에게 결정타를 날릴 것인가?
좀 더 TRPG에서 많이 보이는 예시는 어떠신가요? 한 번 보세요.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이곳에 오셨나요?"
1.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2. 정보를 물어본다. ("갈고리단이라는 단체를 아시오?")
3. 유혹한다. ("당신 송곳니가 정말 섹시하군요?")
4. 공격한다. ("나는 피를 원한다!")
갑자기 너무 자극적인 예시를 들었군요. 이런 건 어떤가요?
눈앞에 나타난 여러 개의 문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문부터 열어보시겠나요?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가나요?
상자가 두 개 보이는군요. 강철 상자와 나무상자입니다.
어떤 상자를 '먼저' 열어보실 건가요? (마스터가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NPC가 심각한 표정으로 당신에게 말을 겁니다.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푸른색 물약병입니다. 병에는 어떤 기호가 그려져 있습니다.
뚜껑을 열어서 마셔보나요?
기호학 지식을 사용해서 어떤 기호인지 분석해보나요?
선택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게임이 영화나 소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게임의 참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 속의 서사와 세계와 상호작용을 합니다. 선택은 그런 상호작용 방식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고 직관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니, 작다고 일축할 수 없겠군요.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큰 문제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수상한 물약병에 적힌 문구는 얼마 전에 누군가 적어둔 것일테고, 그 문구를 적기 위한 언어는 수백 년 전에 누군가 만들어낸 것일 것입니다. 약병에 든 약물은 어떤가요? 누군가 설정하지 않았더라도 약병에 든 약물은 그것을 마신 인간에게 어떠한 효능을 발휘할지 결정되어 있습니다. 약병이 어떠한 장소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누가 그 장소에 둔 것이겠죠? 그 장소 또한 누군가 어떠한 이유에서 준비해두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수상한 약병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무언가 밝혀내거나, 누군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일어날 결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약병을 하늘로 던지면 땅에 떨어집니다. 땅에 떨어진 약병은 깨집니다. 깨진 약병에 담겨 있던 약물은 바닥에 비산하겠지요. 이 모든 행위에 대한 결과가 이미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알 수 있겠지요? 게임 속 시나리오에서 선택은 온전히 저자의 부담입니다.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마스터 입장에서 선택을 추가할 수 있겠으나, 시나리오가 제시하는 방향을 전면적으로 이탈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사실 하나를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나리오 집필에 있어 선택을 부여하는 작업은 귀찮고 번거롭다는 것을요.
그런 까닭으로, 여러 시나리오 중에는 선택이 거의 배제된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나리오들을 폄하하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나리오의 저자가 일관되게 선택을 배제할 경우, 다른 형태의 부담이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통칭 레일로드라고 하는 유형에서 발생하는 이슈인데,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므로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지요! 안녕!
한편, 항상 레일로드와 함께 소환되곤 하는 친구인 샌드박스라는 녀석이 떠오를 겁니다.
이 친구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조금 과감하게 수준을 낮춰서 이야기하자면,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밀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시나리오의 성격을 샌드박스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거시적인 이야기 말고, 선택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중에서 고르기
시나리오에서 구현되는 ‘선택’은 어떤 방식이 바람직할까요? 우선 전제가 필요합니다.
“이 선택으로 시나리오의 전면적인 분기가 발생하는가?” |
전면적인 분기라 함은 시나리오의 절정 혹은 엔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분기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엔딩 직전의 선택지는 제외합니다. 그런 형태는 시나리오의 성격에 영향을 주는 요소라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앞선 시나리오의 진행이 분기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고민의 소요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시나리오가 한창 진행되는 시점에서 전면적인 분기가 존재한다면, 시나리오 저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그 시점에서부터 둘 이상의 시나리오를 써야 함이 원칙입니다. 마스터의 입으로 말해볼까요?
자, 마왕성으로 가는 길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안전하지만 멀리 돌아가는 길. 다른 하나는 빨리 갈 수 있지만, 아주 위험한 길입니다.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싶으신가요?
목적은 마왕성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간 뒤, 안 간 길을 돌아갈 일은 없습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을 볼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다른 쪽 길은 완성되어있어야 합니다.
좋아요. 이번 경우는 어느 정도 의견이 반반으로 갈릴 수 있는 경우였지요? 조금 더 격렬한 차이를 줘볼까요?
자, 마왕성으로 가는 길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위험하고 멀리 돌아가는 길. 다른 하나는 빠르고 안전하게 가는 길입니다.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싶으신가요?
자, 편중된 선택지군요.
사실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자주 이런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야, 10명 중의 9명은 이렇게 할 거야. 그럼 이것만 준비해도 되지 않을까?" 유감이지만, 100명 중에 1명 혹은 10,000명 중의 한 명만 선택할 것 같은 괴상망측한 선택지더라도 그것이 선택지의 형태로 제시되는 한 다른 쪽 길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런 걸 하고 싶지 않다면, 선택지의 형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원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지요. 이는 분명 저자에게 부담을 주는 방식의 작법입니다. 또한 선택의 엄중함은 부여하고 싶되, 시나리오가 분기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전제를 바꿔보지요.
“선택은 무의미하지 않아야 한다.” |
모든 선택이 분기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선택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선택이 플레이어들에게 무의미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시나리오의 흥미와 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당신은 괴물들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 앞쪽에 탈출구가 보이는군요.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당신의 동료가 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아까 당한 부상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모양입니다.
어떻게 하시나요? 두고 혼자 나가면 동료는 죽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데리고 나가다가는 괴물들에게 따라 잡힐 우려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마스터링을 많이 하게 되는군요. 중요한 것은 선택의 형태가 아니라 후속처리입니다.
자, 여기서 귀찮은 저자가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가정해봅시다. '사실 이 선택은 중요하지 않았어.'
이미 저자는 이 장면의 소제목에 소중한 동료의 죽음이라고 적어두었습니다. 이 동료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겠지요.
선택 A - 동료를 버린다.
당신은 결국 동료를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동료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괜찮아,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테니까. 너라도 도망쳐."
눈앞에는 탈출구가 있습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선택 B -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동료를 업고 달리고 있군요. (괜히 주사위 굴리는 척하는 마스터)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괴물의 공격이 날아듭니다!
동료는 피할 수 없는 그 공격에 맞아서 절명하고 맙니다.
눈앞에는 탈출구가 있습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했건 결과는 똑같습니다.
이 선택이 전개에 영향을 준 부분은 대략 세 줄 정도로 정리되는 텍스트 정도지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어차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쓸데없는 고민을 한 것이 됩니다. 이런 식의 선택지는 TRPG 시나리오는 물론 스토리텔링이 있는 다른 게임에서도 생각보다 자주 발견됩니다. 분명히 선택지는 제시하지만, 그 선택지가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사기라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표현이 과격할 뿐 사기여서 문제인 게 아닙니다. 핵심은 후속 조치가 현명하지 못했기에 플레이어로 하여금 허탈함이나 짜증을 느끼게 했다는 점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사기. 음, 역시 표현이 너무 과격한 것 같군요. 가짜 선택지 정도로 정리해봅시다. 가짜 선택지가 제시되었더라도 조금 더 전개와 연출을 정제할 수 있다면, 플레이어에게 마땅히 시간을 들일만 한 고민이었다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덕에 저자는 조금 더 효율적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겠지요.
이것은 리플레이가 제한되는 TRPG이기에 반복 플레이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다른 플랫폼의 게임이 가지기 힘든 장점입니다. 선택 A와 선택 B에 대한 모든 경로를 구성하지 않았더라도, 한 번 선택을 마친 플레이어는 다른 쪽의 선택지에 무엇이 있을지 확인하기는 어렵지요. 그곳이 아무것도 없는 미구현 지역이더라도 말입니다.
그 집에 두 개의 화장실이 있는 이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봅시다!
이건 저자가 겪는 문제라기보다는 게임을 진행하는 마스터를 곤란하게 만드는 종류의 문제입니다.
플레이어가 말 그대로 물리적인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 갈림길은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주는 선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플레이어로 하여금 선택하게 할 마음으로 배치된 갈림길이 아닙니다.
이것도 종종 있는 일이지요.
마스터가 "여러분 고민하지 마세요! 그냥 길이 두 개라고요!"라고 외치게 만드는 그런 갈림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 화장실이 두 개 설치된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시체를 처리하기 더 좋다거나, 그곳에 비밀 금고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나리오는 단순히 그런 집을 구현했을 뿐인데, 갑자기 플레이어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는 거지요. "분명.... 뭔가 의미가 있어!"
그렇다면 이 갈림길은 어떻게 구현해야 할까요?
만약 갈림길이 두 개일 경우, 이후의 구성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를 정하는 선택지는 그것이 저자 입장에서 중요한 선택이었든 아니든,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중대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여러 창작물에서 운명적 결정은 보통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제시되니까요.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이후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도 앞서 있었던 선택하지 않은 하나를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저자가 의도하지도 않은 장면에서 플레이어가 "시나리오가 나에게 불필요한 고민과 갈등을 강요한다." 불만을 느끼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자로서는 실제 거기에서 대단한 변화나 분기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그럴 수 있었다는 느낌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쩐지 작동하지 않는 장치, 누군가 있었던 흔적, 뭔가 짝이 비어있는 물건들. 이것은 상당히 섬세하게 배치되어야 하는 일종의 미장센입니다.
요컨대, 둘 중 하나 선택지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미가 증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기가 발생하지 않는 선택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간단한 방법은 선택지의 숫자를 늘리는 것입니다. 갈림길이 두 개가 아니라 네 개라면 어떨까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이것을 중대한 선택의 기로라고 받아들일 유인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캐릭터가 진행 도중 뒤로 돌아와서 선택을 재시도할 수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런 조건이 없을 경우, 늘어난 선택지에 따른 모든 변화를 몽땅 구현해야 하니까요.
어쨌든 이것은 효율성의 이야기
두 가지 사례는 서로 반대의 양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한 선택이라면,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발휘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선택이 무의미했다고 받아들여질 처리여서도 안 됩니다. 반면에 별다른 고민 없이 이루어지는 선택이라면, 반대로 선택의 결과를 즉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여지를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플레이어가 후회나 미련을 가지게 되면 시나리오의 진행이 의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TRPG가 자유도를 내세우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상당 부분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시나리오의 세계도 저자가 준비성과 지면의 한계로 제한되고, 마스터가 부여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도 묘사력과 한정된 플레이 시간으로 인해 제한적입니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느낌을 구현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이제까지 이야기했던 선택의 순간입니다. 현실적으로 다양한 분기가 다수 존재하는 방대한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어렵다면, 선택에 따른 고민의 정도와 결과의 시점을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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