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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 쿠키!/★ TIP & 자료

시나리오 작법 TIP - 엔딩 분기점

 

 

판정이란 무엇인가?

 

판정이란 무엇일까요? 

보통 초보자들에게 TRPG를 설명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사위 굴리는 걸 판정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판정하라는 이야기를 하면, 옆에 놓인 주사위를 굴리시면 됩니다!" 

"자, 한번 해볼까요? 판정하세요! 야호! 잘했습니다!" 

 

아, 이건 잘못된 설명이군요. 

당장 플레이가 급할 때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만,

플레이가 눈앞에 없는 상황이라면 저도 좀 여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찻잔을 마시며) 후후, 엘몬드경도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어떠한 행위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객관적인 장치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어떠한 행위라는 것은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행위를 의미하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규칙은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행위의 성패를 객관적으로 결정하기 위하여

무작위성을 개입시키곤 합니다. 바로 이런 주사위 같은 것을 이용하여서." 

 

어휴, 사실 저 구구절절한 정의를 어떻게 전달할까 걱정했는데 앞에 "엘몬드경"이라는 말만 들어가도 좀 괜찮군요. 

고마워요, 엘몬드경! 

 

그렇습니다! 객관적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

이것은 마스터나 플레이어의 사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결과를 결정할 때,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오게 해야 한다는 거죠.

 

"야, 이거라면 나도 인정"

 

그래서 우리는 주사위를 굴립니다. 

사기 주사위가 등장하지 않는 선에서는 무작위를 결정하기 위한 아주 손쉬운 방법이니까요. 

 

어쨌거나 판정은 마스터나 플레이어의 인위적인 통제를 배제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여기서 인위적인 통제란 합리적인 근거나 당위 없이 결과의 양상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나 행위 모두를 포함합니다.

 

좋아, 세팅이 끝났군요!

그럼 여기에서 바로 이번의 주제를 이야기해 봅시다.

 

 

여기 축구를 좋아하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시나리오에서 ‘분기’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분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나리오도 많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고전적인 시각에서는 바뀌지 않는 위상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분기가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유지하겠습니다.

 

분기가 중요한 것은 단순히 시간선이 둘 이상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분기로 이루어질 중층화된 시간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그 분기를 어떻게 ‘트리거’ 시키느냐에 있습니다.

 

평행우주 이론에 관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요? 

여러 개의 분기점으로 구성된 시나리오는 작은 규모의 평행우주와 같습니다. 

분기의 시작은 불확실했던 운명이 하나로 결정되는 절차의 시작입니다. 

이로써 플레이어는 비로소 ‘정해진 이야기’가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만큼 분기를 어떻게 발생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시나리오 작성에 있어서, 어쩌면 해당 시나리오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일단 이 부분에서 분기를 발생시키는 유형을 대략적으로 구분해 보겠습니다.

 

1. 선택

 

손흥민 군대 농담은 2년 전 이슈지만... 

 

이것은 쉽게 말하면 객관식 문항 같은 것입니다.

이를 또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성(硬性) 분기입니다. A or B.

축구를 좋아하는 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방식입니다. 

 

"군인이 되는 것과 축구선수가 되는 것 중에서 선택해라."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내리면, 그것으로 어떤 분기가 결정됩니다. 

군인을 원한다면 군인이 되는 것이고, 축구선수를 원한다면 축구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는 느낌을 주는 가장 확실하고도 간단한 방법입니다.

 

게다가 쉬운 방식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캐릭터가 선택권을 가졌으며 플레이어가 그것을 통해 주도권과 자유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플레이어가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은 결코 반갑잖은 청구서가 아니라, 나의 운명을 내가 결정했다는 증명서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분기를 시나리오 내에 집어넣고자 하는 경우, 분기점의 존재를 명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설정할 경우, 플레이어는 시나리오의 시간선과 밀착되지 못합니다.

 

다시 표현하면 “이번의 선택으로 미래가 달라진다”는 점을 강력하게 어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선택이 야기한 결과에 놀라는 것은 대체로 바람직한 현상입니다만, 

놀람의 형태가 아래와 같은 방식이면 곤란합니다.

 

"아니 방금 그 선택으로 결정되는 거였어요?!"

 

이런 식의 항의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플레이어가 자신이 행한 선택의 무게를 오해하는 경우 발생하는 상황입니다. 

 

 

 

다른 하나는 연성(軟性) 분기입니다.

막 이런거 있잖아요? 

캐릭터의 선택이 분기를 발생시킨다는 점은 본질적으로 경성 분기와 동일하지만,

이 선택을 잘게 찢어놓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분기를 가름할 핵심적 선택을 여러 개로 분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 내에서 플레이어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없는 수치를 하나 만듭니다. 
이 수치는 플레이어가 특정한 선택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증감합니다.

특정 시점에서 이 수치에 따라 분기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하나의 결말로 도달한다! 라는 식의 멋진 방식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구성은 플레이어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 요소로 작용할 수 있겠지요. 

이 경우에서는 "그때의 선택이 지금 우리를 이곳에 도달하게 하였다."식의 진행을 선택해도 무관합니다. 

 

다만 이런 식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것은 경성 분기의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2. 판정 

 

판정에서 실패하면 군인이 되는 분기

 

 

판정을 통해서도 분기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초기 TRPG, 그리고 아직 건재한 고전적인 룰들, 더불어 TRPG 바깥에서도 숱하게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투입니다.

 

전투는 그 자체로 분기의 트리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시나리오가 계속 진행되지만, 전투에서 패배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 시점에서 시나리오가 종료되면서 ‘엔딩’을 보게 되지요. 비록 배드 엔딩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투는 단순히 칼을 들고 마주 선 적을 쓰러트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세인에는 전투를 대체하는 재미있는 시스템이 있지요. '의식'입니다. 

 

의식 시트가 등장하는 시점은 대게 클라이맥스 페이즈입니다. 

다양한 룰에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전투를 대체할 수 있는 재미있는 시스템들을 도입하곤 합니다. 

순수하게 전투를 대체한다는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다른 시스템들도 하나의 분기점으로 작동합니다. 

 

어쨌든! 

전투나 의식, 혹은 그에 준하는 다른 것들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특정한 규칙 아래에서 진행되는 판정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고 지나왔듯이 판정은 결과를 도출함에 무작위를 개입시키는 절차입니다.

이렇게 다시 정리해볼까요? 

"무작위로 결과를 정한다."

 

이러한 정리는 근자의 많은 시나리오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이기도 합니다.

엔딩 직전에 판정을 거치고, 판정 결과에 따라 엔딩이 바뀌는 구성 말이죠.

뼈대 자체만 놓고 보면 그것은 ‘최종전’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뼈대는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뼈대를 세우고 집을 지어야겠지만, 뼈대만 가지고 집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전투는 괜찮고, 판정은 안 괜찮아? 

결론을 말하자면, 엔딩 분기 직전에 판정 한 번으로 엔딩의 종류를 결정지어 버리는 구성은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한 방식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결함을 내포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전투 또한 판정의 집합일 뿐인데, 그렇다면 ‘최종전’을 통해 엔딩 분기가 결정되는 방식도 결함이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의 글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전투는 단순히 무작위를 산출하는 절차가 아닙니다.

 

전투는 캐릭터가 해당 전투에 참여하는 시점에서 쌓아온 경험과 스펙을 체감하는 절차입니다.

플레이어는 적지 않은 시간을 거쳐 캐릭터의 경험과 스펙을 쌓았을 것입니다.

이는 캐릭터의 현재 수준에 대하여 플레이어의 책임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전투에도 무작위가 적지 않게 개입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성장이 배제된 시나리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저자는 ‘반드시 패배하는 전투’가 아닌 한 캐릭터가 이길 수 있는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저자가 그러한 원칙을 지켰다는 전제하에, 전투 결과는 캐릭터를 움직이는 플레이어의 책임 영역으로 귀속됩니다.

 

한편 그럼에도 무작위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명백하게 플레이어의 책임이 아닌 결과도 나올 수 있지요. 다만 그러한 가능성은 판정이 반복될수록 낮아집니다. 일반적인 전투는 다회의 판정을 동반합니다.

 

요는 해당 판정의 결과에 플레이어가 얼마나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엔딩 직전에 판정 한 번으로 분기가 나뉜다면, 플레이어는 도출된 결과에 대해 별다른 책임감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이는 또한 앞서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 캐릭터가 겪었던 경험, 선택, 단서, 흐름, 논리 등이 모조리 무시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 막판 한 방으로 결정될 운명이었으면,

앞선 시간들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론 룰이나 시나리오의 장르에 따라, 앞선 시간들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지 않고 운명적 분기가 무작위로 결정되는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해당 룰이나 장르의 특징을 살린 시나리오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앞선 시간들이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는 ‘착각’을 주기 위해서라도, 분기가 발생하기 직전까지는 시나리오의 선택적 개연성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시종 무가치한 상황을 강요하다가 마지막 분기마저 개연성이 상실된 채 무작위로 주어진다면, 설사 그것이 장르적 문법에 충실했다 하더라도 마스터와 플레이어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기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