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t Pot: The Magical Castle
이건 피트 포트라는 게임입니다. 1985년에 세가에서 만든 게임입니다. 잠깐, 당황하지 마세요.
잘못 들어온 게 아닙니다. 자, 진정해요. 제목에 시나리오 작법 TIP이라고 적혀있죠? TRPG 이야기를 할 거예요.
아, 그렇다고 해서 피트 포트가 TRPG라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고전게임이요?
피트 포트의 타이틀 화면입니다. 장르는 퍼즐 액션이고, 피트 포트가 담고 있는 이야기도 그래픽만큼이나 간단합니다.
"마녀에게 납치당한 공주를 구출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당신"은 마녀의 저주를 받은 왕자님입니다.
저주를 받아서, 이상한 꼬꼬마가 되어버렸죠. 덕분에 왕자의 권력을 이용해서 군대를 부르는 것도, 대중의 공분을 일으켜 마녀를 압박하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손에든 망치를 휘둘러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것뿐입니다.
스토리가 간단한 이유는 당시의 게임이 구현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스토리만큼이나 시스템도 간단합니다. 일단 점프나 가속 따위는 없습니다.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맵과 퍼즐이 복잡해지기는 하지만, 규칙 자체는 지극히 간단한 게임입니다.
“적을 죽이거나 바닥을 부수는 방식으로 퍼즐을 풀어 아이템을 획득하고 공주가 있는 곳으로 간다.”
게임 자체는 이제 더 설명할 내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오래되고 간단한 게임을 소환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조건이라고 해도 특정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만, 이 아이템의 종류가 조금 재미있습니다.
엔딩 시점에서 공주는 마법에 걸려 잠이 든 상태입니다.
게다가 공주의 몸속에는 마녀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왕자 또한 마녀의 저주를 받아, 망치질밖에 하지 못하는 꼬꼬마 상태입니다.
그래서 엔딩이 제시하는 조건은 ‘십자가, 물약, 반지를 지참할 것’입니다.
각 아이템의 효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십자가 : 공주의 몸에 숨어있는 마녀를 퇴치함
물약 : 잠든 공주를 깨움
반지 : 내가 왕자(연인)임을 증명하는 물건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만 진정한 엔딩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마녀가 나타나 왕자를 죽이고, 물약이 없다면 공주가 깨어나지 않으며, 반지가 없다면 공주가 왕자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잘 봐, 이제 시나리오 이야기한다
이렇게 아이템으로 상징되는 클리어 조건은, 시나리오의 뼈대를 잡는 조건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즉, 시나리오 내에서 최소한 저 세 가지 조건을 갖추는 편이 좋다는 뜻입니다.
저것들을 시나리오에 맞게 풀어서 이야기해보지요.
1. 십자가
십자가는 게임의 최종 보스를 쓰러트릴 무기입니다. 보스라는 표현은 정겹지만,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은 아니군요.
주인공(플레이어)에게 시련을 안겨줄 모든 종류의 난관과 갈등을 해소할 열쇠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단은 기왕 고전게임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보스라는 표현을 고집해보겠습니다.
보스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보스의 특별함이 항상 강함에서 유발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플레이어에게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을 만큼은 강력해야 합니다. 다른 형태의 매력발산이나, 감정유발은 강함 이후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암만 멋진 디자인이나 설계, 설정을 가지고 있는 보스라고 해도 간단하게 쓰러트릴 수 있다면, 그동안 끌고왔던 극적 긴장감이 전부 흩어져 버릴 테지요. 망한 보스에게 향하는 악평 중 대부분이 "폼 잡더니 이렇게 시시하게..."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보스는 일단 강해야 합니다. 벌써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고 있군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냥 적당히 강한 정도에서 끝나선 안 됩니다. 아주 특별하게 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플레이어들은 서서히 강해지는 몬스터(난관)들을 순차적으로 물리친 상태이기 때문에, 보스가 바로 다음 단계여서는 긴장감을 발생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보스의 강함을 대폭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캐릭터들이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걸고 총력을 다 해야만 겨우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강함은 어느 정도일까요? 이 밸런스를 찾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냥 어려웠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들의 전멸로 마무리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방향의 악평이 등장합니다. "이걸 깨라고 만들었냐..."
여기서 십자가의 존재가 빛을 발합니다. 보스는 기본적으로 정면 승부를 할 경우 캐릭터들이 절대로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설정합니다. 일단 긴장감이든 특별함이든, 최대치로 뽑아먹는 것입니다. 자, 이때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십자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사용하면, 전투가 쉬워지도록 설정하는 것입니다. 쉬워지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스가 주는 피해를 줄이거나, 받는 피해를 늘리거나, 일정 시간 행동 불능이 되거나.
이런 '설정의 추가'는 허무한 승리에도 당위성을 제공합니다. 그냥 대충 길에 굴러다니는 조약돌로 보스를 때려잡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획득에도 이미 충분한 난관과 시련이 있었기 때문에, 보스가 지나치게 쉽게 쓰러지더라도, 플레이어들이 그것에 실망을 느끼기보다는 쾌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다행이야! 역시 그 고생을 해서 십자가를 챙겨온 보람이 있었어!" 십자가의 존재는 이렇게 마지막 전투에서 극적인 효과를 주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획득에서 발생하는 난관은 최종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부차적 목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얻게 되기보다, 십자가를 얻기 위한 모험을 별도로 추가하거나 획득 장면에 차별성을 두어 시나리오의 흐름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2. 물약
물약이 의미하는 것은 피해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룰이나 시나리오의 성격에 따라 형태가 매우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트 포트에서처럼 누군가를 구출하는 것이 목표라면, 구출해야 할 대상의 상태를 고려해야 합니다. 멀쩡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 전염병을 퍼트리고 있다면, 그것을 퍼트린 자만 제거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도시에 창궐한 전염병을 몰아낼 방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세상을 대충 멸망시킨 마왕을 박살 냈는데, 마왕이 열어놓은 마계 차원문이 있다면 어떨까요? 문을 닫을 열쇠가 있으면 좋겠군요.
이처럼 물약은 시나리오에서 제시하는 문제의 해결 방식을 풍성하고 개연성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입니다. 보스만 두들겨 패버리고 끝나는 시나리오가 반복된다면, 플레이는 이내 지루해질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시킨 피해를 어떤 방식으로 회복시켜야 하는가. 혹은 내가 더 살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시나리오를 좀 더 입체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플레이어들에게 일종의 책임감을 부여합니다.
이런 고려가 없다면, 플레이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멸종과 폐허, 그리고 시체만 남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룰이나 시나리오에 따라 예외는 있겠습니다만, 보편적인 상황에서 플레이어와 캐릭터들은 지켜야 할 상식의 선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도덕이나 윤리일 수도 있고, 동료와의 협력일 수 있으며, 한편 시나리오가 제시하는 세계관의 인과율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물약은 피해의 회복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합의를 지키도록 유도하는 안내판이기도 합니다.
3. 반지
반지는 주인공이 왕자라는 증거입니다.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단순히 길 가던 아저씨가 아니라는 의미이고, 공주와 어떤 인연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물론 마녀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문제도 있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공주를 반드시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왜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상징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조건은 어떤 시점에서 등장하느냐에 따라 시나리오의 구성이 크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지가 없었다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위험이 생깁니다. 평화로운 일상이나 마냥 즐거운 상황만을 연출하는 게임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은 불합리한 난관이나, 괴로운 시련에 몸을 던져야 할 일이 더 많지요. 그런 상황에서 반지를 가지지 못한 플레이어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제 캐릭터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 몸을 던지지 않고 싶을 것 같아요."
그렇기에 초보자에게 권장되는 시나리오는 시작하는 시점에서 반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예 캐릭터 설정과 동기가 대부분 정해져 있는 시나리오를 플레이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시나리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지가 초반부터 캐릭터와 함께한다면, 플레이어는 문제 해결의 강한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나요?"에 대한 설명을 갖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캐릭터가 일탈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작아집니다. 반전을 일으키기는 어렵지만, 안정적인 이야기 진행을 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의 일탈 행동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에서 편리한 방식입니다. 플레이어가 답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니까요.
반면에 반지가 중후반부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반지 자체가 하나의 반전이 됩니다. 딱히 내가 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에 확신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올려주고 플레이어의 몰입 정도를 상승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얘는 왜 이런 소리를 하는가?
과한 해석이 아니냐고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실제로 피트 포트에서 드러나는 서사적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85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기에 오히려 이야기에 필수적인 요소들이 명확한 형태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확신을 담아서 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기획 초기에는 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필수 아이템 세 개를 모아야 한다."
기획서에 적혀 있던 이 필수 아이템을 단순히 ‘빨간색 보석, 파란색 보석, 노란색 보석’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피트 포트에서는 짧게나마 프롤로그와 엔딩을 주고 클리어 조건에 서사의 강력한 상징을 부여했습니다.
시나리오도 결국 게임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건 TRPG죠? 상황에 따라서 조금 달라질 수도 있지만, TRPG를 진행하는 중에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생기를 잃을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감춰주는 사람도 많지만, 참지 못하고 말해버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선언 들어 본 적 있나요?
"아, 쟤 죽이면 되는 거죠?"
캐릭터와 세계에 대한 이입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꼭 저게 아니더라도 비슷한 대사는 많습니다. "시간 없으니까, 그냥 그런 거로 할게요.", "인질도 그냥 죽여요.", "아, 그냥 때려요", "그냥 불 지를래요.", "이걸 제가 왜 줘요?", "제가요?"
이렇듯 게임을 설계하면서 어떠한 당위와 목표를 부여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게다가 장문으로 구성되는 시나리오의 특성상, 어떠한 요소를 게임의 부속품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매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만들어 놓는 것까지는 재미있고 쉽거든요. 그다음에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쓰러트릴(극복할) 수 있을까? 플레이어가 도망 안 가고 꼭 이걸 해야 할 이유는 뭘까? 이 난리를 어떻게 원래대로 되돌리지?
그럴 때 옛 시절의 간단하고 담백했던 게임들의 뼈대를 들여다보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괴물의 정수리에 망치질하는 꼬꼬마의 이야기라고 해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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