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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PG BOOK/[Quill]

포기당한 인간성

본 게시물은 스콧 말트하우스가 제작하고 이야기와 놀이에서 번역한 '혼자서 즐길 수 있는 편지 쓰기 롤플레잉 게임 퀼Quill' 비공식 팬메이드 시나리오입니다. 플레이를 위해서는 퀼Quill 규칙의 숙지가 필요합니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편지 쓰기 롤플레잉 게임 퀼Quill'은 이야기와 놀이 블로그 자료실에서 무료 배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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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당한 인간성

 

 


시나리오 소개

 

신이 처음 이 길로 들어서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족과 친지들은 입을 모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반대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당신은 자신이 결정한 길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보다는 어리기도 했고요. 주변의 반대는 무엇을 잘 몰라서그러는 것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 와중에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길이다. 정 원한다면 도울 수 있을 만큼 도와주겠지만,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떨까요. 이제 와서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더라도 오늘의 위기를 회피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조금은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당신은 대학원생입니다. 전공은 학부 시절에 택했던 그대로입니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학사 논문도 지도교수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극찬을 방어적으로 받아들였어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어차피 학사 논문은 형식적으로 쓰는 거니까요. 그러나 교수의 평가를 불신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사 과정에 들어서면서 할 일은 많아지고 바빠졌습니다. 일상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져 버렸지요. 힘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짜증은 나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의 프로젝트는 정말 중요한 것이어서, 당신은 귀가하지도 못하고 연구실에서 숙식하다시피 해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은 바깥세상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도 몰랐습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나갈 일이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연구실을 나섰던 것은, 바깥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상을 포기했더라도 인간성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인간성은 곧 위기를 맞이합니다.

정문이 폐쇄되었기 때문입니다. 학교 정문에는 원래 별도의 문이 없습니다. 그러니 폐쇄되었다는 것은 장애물을 가져다 놓았다는 뜻입니다. 정문을 막아놓은 깔끔하고 견고한 철조망을 보고 당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몸이 성치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왜 정문을 막아놓았을까요?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철창 너머로, 당신이 몰랐던 새로운 유행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덩어리로 뭉쳐 움직이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였습니다. 다수의 사람이 모여 있다는 점에서 집회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당신의 눈에 보인 모습은 절대로 집회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신음, 느릿한 걸음, 그리고 절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처참한 몰골.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이 무엇인지는 한눈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형태의 축제가 진행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럴싸한 생각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좀비’라니요?

 

얼마 후, 당신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희생자의 외침, 솟구치는 붉은 피, 사람 형상의 괴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광경. 인터넷에 접속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릴 만큼 냉정을 회복한 후에야, 당신은 현재의 사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미상의 괴 바이러스가 창궐한 탓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치명적인 질병에 대응하는 방법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어진 설명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괴 바이러스에 대한 내용 말입니다.

 

물리적 접촉에 의해 전파되는 바이러스. 감염 후 48시간 동안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습니다. 잠복기를 지나 증상이 발현되는 즉시 감염자는 사망합니다. 사망을 증상이라고 할 수 있나요? 더 황당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주변의 생명체들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이미 사회체계는 붕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군요.

 

원래 숙식을 하던 곳이어서 당장의 생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여태 연구실에 처박혀 있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숨죽이고 있으면 안전할 테지요. 문득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이번의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거의 완성되었고 교수님을 만나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요. 현재 교수님은 학교에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은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찾아뵙고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교수님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걸까요?

 

나중에라도 교수님이 메일을 확인하신다면 좋겠군요. 포기 당한 인간성에 대한 존중은 일단 제쳐둡시다. 아직 냄새가 날 지경은 아니니까요.

 


서신 규칙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필체 판정에 실패할 경우, 오탈자가 발생한 것으로 처리합니다(점수는 필체와 동일하게 처리합니다).

 

당신은 불행하기는 해도 유능한 대학원생입니다. 이번 세션에서 기술을 ‘두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잉크병

 

안녕하십니까? 근계(謹啓)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하게
갇히다 고립되다
괴상한 바이러스 상세 미상의 감염병
좀비 사태 불가피한 사정
걱정 심려
시키신 일 준비하던 프로젝트
죄송하다 송구하다
무사 무탈
드림 올림

 


결과

 

■ 5점 이하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복잡한 심경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바깥 상황 때문이었을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시 쓴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잘 쓸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바깥에 난리가 났으니 교수님은 자택에 계시겠지요. 교수님의 자택이 어디인지는 잘 압니다. 일 때문이든 아니든 자주 찾아갔으니까요. 차를 타고 가면 금방입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용할 수 있는 트럭이 한 대 있습니다.

 

트럭에 오른 당신은 빠져나갈 길을 떠올립니다. 정문은 막혀 있었으니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대학 자체가 폐쇄되었다면 열려 있는 문이 없을 것 같은데요. 떠오르는 한 곳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학술림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학술림은 대학 부지에 포함되어 있지만, 담장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 학술림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교수님 댁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자주 갔던 곳이니만큼 금방 도착할 수 있을…… 잠깐만요. 도로를 사람들이 메우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옷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멀쩡한 옷을 입은 경우 그렇다는 말입니다. 찢어져 너덜거리고 나풀거리는 옷을 걸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간혹 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귓가를 울리는 기괴한 신음. 사람들이 비명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괴이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트럭을 향해 손을 뻗고 천천히 다가옵니다.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신은 급하게 트럭을 후진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트럭 뒤편으로도 사람들이 가득 찼습니다. 모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당신을 향해 다가옵니다. 달아나야 합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 6~9점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다고는 이야기하지 못하겠군요. 교수님께서 아량을 베푸신다면 당신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당신은 컴퓨터를 끈 다음, 침상 위에 아무렇게나 누웠습니다. 지난 몇 주간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지요. 교수님께 사정을 알리는 메일은 보냈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잠이나 자는 게 좋겠습니다.

 

수면 부족이어서 그런지 정신없이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누군가 당신의 몸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습니다. 체감상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눈을 떠보니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일어나요!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당신과 같은 대학원생이었습니다. 전공은 전혀 달랐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남의 연구실까지 와서 단잠을 깨우다니요. 당신이 얼른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상대는 당신의 뺨을 찰싹 때립니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만, 정신이 듭니다. 그가 말합니다. 놈들이 오고 있다고요. 일단 여기를 떠나서 다른 곳에 숨어야 한다고 합니다. 놈들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게다가 다른 곳이라고 해도 어디로…….

 

물어볼 틈도 없이 상대가 당신의 팔을 잡아끕니다. 당신은 딸려가다시피 연구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멀찍이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립니다.

 

멈춰라!”

 

전투복, 고글, 마스크. 옷의 색깔이 검은색이 아니었다면 군인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물론 군인일지도 모르지요. 총을 들고 있으니까요.

 

멈추라는 소리를 듣고 제꺽 멈춰 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학원생을 따라 어디론가 정신없이 달려가던 당신은, 갑자기 들려온 총성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총성이라고요? 저 사람들이 총을 쐈습니다! 한국의 백주대로에서 민간인에게 사격을 가하다니요.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앞서 달리던 대학원생이 고꾸라집니다. 다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당신은 황급히 쓰러진 대학원생을 일으켜 세우려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두고 달아나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들쳐 업고서라도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뒤에서 쫓아온 자들이 순식간에 다가와 당신을 쓰러뜨리고 제압했습니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들이 당신을 기절시켰으니까요.

 

 

■ 10점 이상

메일을 보냈습니다. 성의와 진심을 다한 글이니 교수님께서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겠지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잠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던 당신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메일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설마 교수님께서 보내신 걸까요?

 

그렇습니다. 교수님께서 당신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고 답신을 보내셨습니다. 당신은 황급히 교수님이 보낸 메일을 열어보았습니다. 답신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당신이 무사하다니 기쁘며, 지금 수습을 하러 갈 것이니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고요. 무사한 것에 기뻐하실 정도로 바깥의 상황이 좋지 않은가 보군요. 그러고 보면 아직도 믿기 어렵습니다. 계엄이라든가, 바이러스라든가.

 

누구의 명이라고 어기겠습니까.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당신은 교수님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겠군요. 교수님이 오신다니 차림새를 조금이라도 깔끔하게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세수하고 옷의 먼지를 털었습니다. 슬리퍼를 벗고 신발도 신었습니다. 조그마한 거울 앞에서 머리도 매만졌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교수님께서 좀처럼 오시지 않는군요. 그러나 이상할 게 없습니다. 바깥의 상황을 생각하면 직접 오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겠지요. 교수님을 기다린다는 긴장감이 약간 풀어질 때쯤, 연구실의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교수님입니다!

 

자네, 안에 있는가?”

 

당신이 대답한 순간 문이 열립니다. ? 그런데 교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문 앞에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택티컬한 복장들이군요. 게임이라든지 국군의 날 행사에서 봤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군인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좀비 사태로부터 당신을 구하러 온 사람들일까요? 당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현실 도피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요. 검은 전투복을 입은 무장 인원들은 당신을 거칠게 쓰러뜨려 제압했으니까요.

 

이게 무슨 짓인가? 했던 말과 다르지 않나!”

 

규정대로 해야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당황한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당황하기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겨우 꿈틀거려 보아도 누르는 힘이 강해질 뿐입니다. 교수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물어보기도 전에 왼쪽 팔이 따끔해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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