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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 쿠키!/★ 룰 소개

룰 소개 - 호텔 리스베르타 세계관 비하인드(상) (w. 연어)

본 게시글은 연어(@salmon_please)가 작성하고
프로젝트 쿠키가 '격월 쿠키'로 대리 배포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호텔 리스베르타 제작자 연어입니다.

 

호텔 리스베르타는 1920년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인간이 아닌 고객들을 맞이하는 호텔 직원들의 이야기입니다. 호텔의 특별한 고객들은 물론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 직원들도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태어난 존재들인데요. 룰북에는 고객과 직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12개의 바깥 세계(2개는 이미 사라졌습니다만), 21개 종족에 대한 설정과 예시 직원, 예시 고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과, 그 차원에 사는 종족들을 어떤 의도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풀어내볼 건데요. 제가 평소에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고, 무슨 작품을 보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분량상 오늘은 상편입니다.

 

다만 여기 나온 설명은 제작자의 초기 의도였을 뿐이지,

진정한 설정은 여러분의 테이블에서 결정된다는 사실 알고 계시죠?

 

그럼 시작합니다!

 

(소개 순서는 설정이 만들어진 순서와 같습니다.)

 

 

1. 에이다-베트라하프

일단 저는 바깥 세계를 만들 때 흔히 판타지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종족을 넣는 것을 지양했습니다. 저작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고, 흔히 아는 익숙한 종족은 굳이 넣지 않아도 플레이를 하는 팀에서 조율하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판타지 종족이 나오는 수많은 작품의 세계관을 자체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요.

 

그래도 드래곤을 넣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드래곤은 판타지의 꽃이니까요. 

 

이영도, <드래곤 라자>, 황금가지, 2008

에이다-베트라하프는 드래곤이 사는 세계입니다. 호텔의 사장님인 드래곤 리스베르타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호텔 리스베르타 세계의 종족들에게는 각기 다른 이름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드래곤은 한국 전통에 따라 다섯 글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답니다.

 

어느 세계관이든 드래곤은 먹이사슬의 최고층, 최강의 마법 생물이기 때문에 드래곤을 받쳐줄 많은 구성원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족 밸런스가 맞지 않아요. 

 

많은 구성원을 충족하기 위해 에이다-베트라하프는 에이다라는 차원과 베트라하프라는 차원이 부딪혀 하나가 된 차원이 되었습니다. 한 차원에 차원이 두 개! 구성원도 두 배!

 

두 차원의 세부적인 특징을 만들 때는 노골적으로 대조되는 느낌이 나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처음 읽는 세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끔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에이다는 에트루리아 신화와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따뜻한 봄의 세계이고, 베트라하프는 북유럽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삭막한 겨울의 세계입니다.

 

종족도 그에 어울리도록, 에이다에는 에트루리아 신화에 나오는 새의 날개를 단 여신 라사와 그리스 신화의 요정인 님프를 차용한 종족이 있고, 베트라하프에는 북유럽 거인인 요툰과 요정 트롤을 차용한 종족이 있습니다.

 

여기서 트롤의 외형은 게임 워크래프트에 나오는 트롤이 아니라 북유럽 민담에 등장하는 원형에 가깝습니다.

 

John Bauer, <The Princess and the Trolls>의 삽화, 1913

하나로 융합된 차원이라는 설정은 크기가 차원 단위일뿐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과 흡사합니다. 보통 서로 다른 문화권이 불시에 마주치면 각자의 입장차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차원 간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전쟁을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아요.)

 

다행히 지구의 시간선에서 바라보면 에이다-베트라하프는 전쟁이 끝난지 수십 년이 흘러 안정된 상태입니다. 과격한 차원 간의 결합과 그 여파를 수습하며 세워진 ‘피에솔라’라는 도시는 지구가 겪을 문제를 미리 겪고 있기도 합니다.

 

두 차원의 종족들은 서로의 세계가 결합되고, 다양한 문화가 섞이면서 원래의 모습과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게 됩니다. 고향을 떠나 여행을 하거나, 도시 생활을 하게 되죠. 그래야만 이들이 호텔의 고객으로서 지구에 방문하게 될테니까요. 

 

각 세계와 세계의 주민을 구상할 때 언제나 염두에 둔 점도 어떻게 해야 이들이 호텔에 자연스럽게 방문하게 될지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점이었습니다. 다른 차원과 완전히 고립된 차원에서 방문하는 고객은 너무 희소한 설정입니다. 특별하지만 그만큼 한정되죠. 그래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기가 힘들어요. 특별한 캐릭터는 각 테이블에서 만드는 편이 좋습니다. 원하는 취향을 넣어서 특별 제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많이 만들어 주세요.)

 


2. 올람

세계관을 만들 때, 여러 소재를 늘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작업을 진행했는데, 기록을 살펴보니 두 번째로 만든 세계는 올람이었습니다.

 

올람에는 코스믹 호러 버전 천사를 닮은 카나프와 중세 기독교 미술 버전 토끼를 닮은 에레가 각각 하늘섬과 바닥땅에 삽니다. 두 종족은 신화적, 예술적 측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아래 첨부한 참고 그림은 다소 징그러워 사람에 따라 보기 힘들 수 있단 점을 알려드립니다.)

 

Dan Hillier, <Seraphim Ⅱ-giclee print>, 2010.
Jonas Pfeiffer, <Seraph>의 스크린샷, 2022

 

 카나프의 설정은 위와 같이 천사의 두려운 모습을 표현한 작품에서 왔습니다. 날개가 본체인 카나프는 신체의 형상들이 제멋대로 붙어 있는데요. 설령 멀쩡해 보이는 신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카나프가 뿜어내는 환각 물질 때문에 다른 종족은 신화적 존재의 두려움, 경외감을 느끼게 되죠.

 

그럼에도 카나프가 귀여워(?) 보이도록 한 부분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이 모든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카나프는 환각 물질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어서 도망다니듯 차원을 넘나들며 살아가죠. 

 

호텔 고객들에게 온갖 환각을 체험시켜줄 코스믹 호러적 존재인 카나프를 만들고 나니, 이런 신화적 존재에게 사교도가 붙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카나프를 숭배하는 토끼를 닮은 종족 에레가 탄생했습니다.

 

Smithfield Decretals, 1300

중세 기독교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폭력적인 토끼는 우리가 흔히 보는 귀여운 집토끼와는 종이 다른 산토끼(Hare)입니다. 중세의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처럼 카나프를 숭배하게 된 에레에게 딱 맞는 이미지였죠.

 

본래 평범한 동물이었던 에레는 카나프의 환각 물질로 인해 이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광신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카나프가 도망다니듯이 차원을 넘나드는 이유에는 자신들이 에레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 변화시켰다는 두려움도 있을 겁니다. 재밌지 않나요? 


3. 코르포리스 세피테르남

이름도 긴 이 종족은 오브젝트 헤드라는 카테고리에 속합니다.

오브젝트 헤드는 말 그대로 머리가 사물인 존재를 일컫습니다.

 

&lsquo;NO MORE 영화도둑(映画泥棒)&rsquo; 일본의 영화 불법 촬영 방지 캠페인에 등장하는 오브젝트 헤드 캐릭터들, 트위터 계정 @eigadorobo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비인간 종족을 이 룰에 담겠어, 라는 포부를 안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종족을 넣기로 결심했기에 오브젝트 헤드도 소재 목록에 있었습니다. 다만 초기에는 로봇 및 안드로이드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앞서 올람의 카나프를 만들면서 카나프와 달리 이지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코스믹 호러적인 무언가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코르포리스 세피테르남의 세계를 먹어치우고 이들을 따라다니는 공포의 존재 니힐룸이었습니다. 그 순간 한 종족의 비극적인 운명이 결정된 것이었죠.

 

한 세계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의 이미지를 위해, 머리를 교체하면 이전의 기억을 소실하지만 넘어간 차원의 물건을 머리로 대체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설정이 붙고, 장엄한 분위기를 위해 이름도 라틴어에서 따왔습니다(영원한 육체라는 단어를 변형). 이렇게 니힐룸을 피해 세계를 넘어가며 힘겹게 생을 이어가면서도, 니힐룸에 닿거나 머리를 영구히 떼어내지 않으면 영원히 살아가는 슬픈 존재를 저는 어쩌다 만들게 되었을까요?

 

이 설정을 만들 때는 이렇게까지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약간 미안한 기분입니다. (웃는 입을 가리는 손)


4. 우그네라흐

우그네라흐는 언데드의 세계입니다. 이 언데드는 죽음 후 죽은 채로 다시 살아나는 일반적인 언데드와는 다르게, 영원히 살게 되는 저주를 받아 탄생과 죽음이 사라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살과 가죽이 썩어 사라지고, 뼈도 풍화되어 사라지는 수순을 밟게 되죠.

 

일반적인 판타지의 평범한 언데드는 아쉬운데, 라고 생각하던 차에 당시 읽었던 웹소설 두 작품에서 우그네라흐의 모티브가 나왔습니다.

 

푸뱅,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 뿔미디어, 2021
코기베어, <불사자 대 저승사자>, 다산북스, 2021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설정을 따왔는지 밝히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이라는 작품에서는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역시 죽어서 언데드로 부활한 사람보다는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더 재밌는 설정이었죠.

 

이 작품은 이들의 기이한 상황을 굉장히 아름답고 우아하게 그렸어요. 하지만 저는 다른 작품도 함께 보고 있었기 때문에 설정이 섞여 혼종이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불사자 대 저승사자>라는 작품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함께 쓰이지 않았던 온갖 소재가 짬뽕되어 있는 세계관을 다루고 있는데요. 주인공의 적인 불사자는 말 그대로 불사인 모든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흡혈귀처럼 이들은 자신의 불사성을 타인에게 줄 수도 있어요. 불사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도 없기 때문에, 이들끼리 전쟁을 하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피웅덩이에서 살아나고 다시 쓰러지고를 반복합니다.

 

이 처절한 불사자들의 세계에 감명받은 저는 영원히 살아가는 언데드가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생명을 납치해 이 저주에 감염되게 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우그네라흐의 언데드는 다른 세계에서 납치를 일삼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었죠. 

 

모든 것이 풍화되어 스타워즈 타투인의 사막처럼 된 세계에서 중세 귀족과 기사들이 사람들을 약탈해오는 세계는 옛날 만화처럼 고풍스러우면서도 생과 사의 치열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에 듭니다.


5. 천지

수인은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동물 얼굴을 한 존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나요? 디즈니와 지브리가 우리를 그렇게 키웠습니다.

 

삼촌, <이런 영웅은 싫어>, 2011-2017 네이버 연재

 

천지의 세계 설정의 기반은 <이런 영웅은 싫어>에서 따왔습니다. 다만, 이 세계에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좀 더 자연 상태에 가까워요. 이미지는 오히려 <모노노케 히메>의 모로 일족과 흡사합니다.

 

그리고 영물의 설정은 이무기가 오랜 세월 도를 닦아 용이 되듯이, 동물이 깨달음을 얻어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는 존재가 된다는 ‘영물’의 본래 의미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영물의 자손 즉 혼혈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둔갑 밖에는 할 수 없는 동물에 불과하죠.

 

이런 동양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가고자 천지의 모든 이름은 한자로 짓습니다. 이름이 길어질수록 오래 살고 사는 동안 좋은 업을 많이 쌓았고요. 받거나, 지은 이름은 모두 영물이 모이는 ‘성지’에 기록됩니다.

 

바깥 세계는 지구보다는 다차원 세계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천지도 다른 세계와 교류하면서 변화해왔죠. 영물은 자력으로 다른 세계를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영물이 모이는 성지가 다른 세계의 영향을 받아 현대화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자연 상태이지만 성지만 모습이 다른 거예요. 성지의 인위적인 건축물 사이로 영물이 옷가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입니다. 이런 그림은 지브리 애니메이션 느낌이 나면서도 산업사회 우화 같은 느낌이 들죠. 


6.트라바

트라바에는 식물형 생명체인 첼라벡이 살고 있습니다. 식물 모습의 종족은 아주 초기부터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가 <식물 대 좀비>라는 게임을 좋아하거든요. 

 

<식물 대 좀비>, 팝캡 게임즈, 2009

 

<식물 대 좀비>는 좀비 세상에서 좀비를 퇴치할 수 있는 식물을 마당에 배치해 집을 지키는 디펜스 게임입니다. 해바라기, 콩나무, 선인장, 수박 등 다양한 식물이 등장하죠. 이 게임을 모티브로 트라바의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화분에 들어있으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으니 마블 코믹스의 그루트처럼 걸어다니는 식물이 되었죠.

 

좀비는 이미 언데드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바이러스로 대체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일반 식물과 첼라벡을 모두 감염시키기에, 첼라벡은 바이러스 창궐 전과 달리 흙이 아닌 돌과 금속 위에 집을 짓고 땅으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바깥의 식물을 모두 불태워버리죠. 코로나와 인수공통감염병의 경험이 녹아 있는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트라바는 바이러스로 인해 고립된 첼라벡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하며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마을끼리 유대를 굳히고 후대를 이어가는지, 절대적으로 부족한 여러 자원을 어떻게 바깥 세계에서 조달하는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말이죠.

 

저의 희먕이 녹아있어서 그런지 첼라벡은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다음 세대를 위해 서로 꽃가루를 교환하고, 수생식물이 자랄 환경을 구축하고, 바깥 세계에서 조달해 온 자원을 마을끼리 나눠갖으며 협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때때로 다른 세계를 오염시키는 빌런도 나타나지만, 그조차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싶다는 선한 목적이 일그러져 생긴 모습일 뿐이죠.

 


자, 이렇게 절반의 소개가 끝났습니다. 여기까지 재미있었나요?

그럼 하편은 다음 격월쿠키에서!